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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모형과 B-29폭격기 by Alan Wilson CC-BY-SA-2.0(Wikimedia commons) 


“나는 이 세계를 산산조각 내는 죽음의 신이 되었다.”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29분 45초. 미국 뉴멕시코주 모래사막 한복판에서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솟아올랐습니다.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년)가 역사상 최초로 핵폭탄 실험을 마친 뒤 떠올린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내용입니다. 

암호명 ‘트리니티’(삼위일체)로 불린 역사상 최초의 핵폭탄이 작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6km 떨어진 관측소에서 핵폭발 장면을 목격하던 과학자들은 황금빛, 진홍빛, 보랏빛이 뒤섞인 섬광이 주변의 산봉우리와 산마루, 계곡 깊숙이까지 환하게 비추자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40여 초 뒤 상공 12km까지 치솟은 거대한 버섯구름을 보자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이름 붙여진 이 극비 실험의 총책임자는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 물리학과 오펜하이머 교수였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핵실험에 대한 만족감과 함께 앞으로 다가올 참극에 대해 심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오펜하이머, “내 방식 아니면 원자탄 꿈도 꾸지 말라”


첫 핵폭탄 실험 후 촬영 사진. 오펜하이머(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와 그로브스 대령(네 번째) 
ⓒ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오펜하이머는 대규모 과학자 및 공학자 팀이 수행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까닭에 ‘원자폭탄의 아버지’란 섬뜩한 별명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인들에게 ‘오피’(Oppie)라는 친근한 애칭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를 3년 만에 마치고 독일 괴팅겐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천재 이론물리학자였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신문도 보지 않고 라디오도 듣지 않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학자였습니다. 1936년 선거 때까지 단 한 번 투표도 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이런 그가 핵무기 제조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애국심이나 공명심보다는 순수한 탐구욕이 앞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12만 5000명이 동원된 사상 최대의 과학 프로젝트는 가동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6개국 언어에 능통했던 그는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인재를 끌어모을 수 있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에게 이 프로젝트는 대학원 세미나처럼 토론 방식으로 운영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행정책임자였던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은 불도저 같은 성격을 반영하듯 과학자에게 계급을 부여하고 복장을 통일했으며 군사훈련까지 시키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 오펜하이머는 “만일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운영하지 않으면 원자탄은 꿈도 꾸지 말라”라고 맞섰습니다. 결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과학자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서한을 통해 “미국의 과학은 적의 어떤 도전도 충분히 감당해 낼 것”이라며 오펜하이머를 격려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특명, 유럽에 파시즘을 막아라!

일본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된 직후 모습 ⓒ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맨해튼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모인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오펜하이머를 포함해 파시즘이 유럽에서 승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스페인 내전이 발생했을 때 프랑코 파시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독일보다 먼저 핵폭탄을 개발하지 않으면 유럽 전체가 전체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절실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이 패망하자 절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이미 개발된 핵폭탄을 사용하는 일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남태평양 전투에서 많은 희생을 치른 미국 정부는 일본 본토에 상륙해 더 많은 군인이 희생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1945년 5월 오펜하이머와 페르미, 로렌스, 콤프턴 등 4명의 과학자는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오펜하이머는 ‘배타적인 것은 상호 보완적’이라는 보어의 상보성을 내세웠습니다. 핵폭탄이 죽음의 무기이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을 끝내고 인류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네 사람은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하기로 결론 내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일명 ‘홀쭉이’(Little Boy)라 불리는 우라늄 폭탄이 투하됐고, 3일 뒤에는 나가사키에 ‘뚱뚱이’(Fat Man)라 명명된 플루토늄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이 결과, 예상했던 피해 인원은 2만 명에 불과했던 반면, 실제로는 10배가 넘는 22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펜하이머, “트루먼 대통령이 나의 손에 피를 묻혔다”

로버트 오펜하이머 ⓒ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우리는 대단히 끔찍한 무기를 만들었고, 이는 세계를 한순간에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중략) 우리는 과연 과학이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핵무기를 개발한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자식과도 같았던 창조물을 공포와 침략의 무기라며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10월 오펜하이머는 “트루먼 대통령이 나의 손에 피를 묻혔다”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피는 내 손에 묻었으니 당신은 상관하지 마시오”라고 답했습니다. 1949년 옛 소련이 원폭 실험에 성공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수소폭탄을 개발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당시 미국원자력위원회 회장직을 마치고 유엔에 파견된 원자력 자문위원이었던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더 나아가 유엔 차원에서 원자폭탄 사용을 규제하는 법률을 제정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 즈음 반공주의가 극에 달했던 시기, 오펜하이머는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표적이 됩니다. 매카시는 오펜하이머를 옛 소련의 간첩이라고 미연방수사국(FBI)에 고발했습니다. 이에 미국 정부는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오펜하이머를 모든 공직에서 박탈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노벨물리학상을 타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가 개발한 핵무기가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한다’는 노벨상의 취지에 어긋났기 때문은 아닐까요?

참고문헌
《과학동아》, 1999년 6월호, 과학자들이 펼친 죽음의 안무, 130~135pp.
https://en.wikipedia.org/wiki/J._Robert_Oppenheimer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222051295&code=99010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8062118405&code=900308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80422/8569948/1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70629/8460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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